[Interview]한국 최초 전통 창호 연구가 주남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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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한국 최초 전통 창호 연구가 주남철 교수
  • 월간 WINDOOR
  • 승인 2010.01.12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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窓으로 傳統과 소통하다

한국 최초 전통 창호 연구가 주남철 교수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사람에게는 각자 고유의 영역을 확보하고자 하는 욕망 또한 자연스레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정점에 나의 영역과 남의 영역을 구분 짓기 위한 칸막이가 필요했고 소통을 위한 문과 창호가 나타나게 되었다. 독자적인 공간을 원하면 닫기만 하면 되고 소통하고 싶다면 열기만 하면 되는 이 편리하고 특별한 도구 속에 한국의 건축의 역사도 고스란히 발전하게 된 것이다. 동면의 앞뒤처럼 폐쇄와 열림, 소통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이 무엇. 그러나 그 중요성에 비해 연구는 미미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보기 좋게 거부하듯 40여 년간 문과 창호에 대한 연구를 해온 건축가가 있다.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인 주남철 교수는 묵묵히 전통적인 한국의 문과 창호를 연구하며 한국의 독자성에 대한 의미 있는 성찰을 이끌어 내는 선구자 역할을 감당해 온 것이다.

 

전통 창호와의 조우
건축이 전공이었던 주 교수가 창에 대한 관심을 가진 계기는 우연하고도 당연하게 이루어 졌다. 건축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공간의 특성을 연구하다 보니 우리나라의 독특한 창호가 그 공간의 특성을 자리매김하는 데 아주 큰 역할을 차지하더라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미술사학회의 전신이었던 고고미술사동인에서 발행한 ‘고고미술’이라는 1965년에 나온 작은 잡지에 기고한 논문에서 주 교수의 관심이 시작된다.
“ ‘이조 주택의 창과 문에 나타난 공간성’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논문을 싣게 됐죠. 이를 계기로 창호에 더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총 망라된 것이 이화여자대학교에 봉직할 시절 ‘한국 창호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상당히 큰 논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창호의 모양새를 처음으로 정리했고 무대디자인을 위해 그 도판을 달라고 KBS와 TBC같은 방송사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도 쏟아졌다. 실내장식 업체들의 문의 또한 쇄도했고 미술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전통문양을 디자인하는데 응용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주교수가 조교들과 함께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우리나라의 특색 있는 창호를 촬영한 이화여자대학이 출판한 ‘포토다이어리’를 보고 창호업자들이 이용하게도 됐다.
“한국 건축의 공간적 특성에서 창호가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죠. 그래서 40년 동안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창호 연구를 위한 열정
한국 건축의 창호분야에서 최고와 최초라는 자랑스러운 수식어를 지녔지만 주 교수에게도 모든 일이 순리대로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전국을 답사하다 보니 교통편도 불편했고 연구비가 따로 지급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모두 자비로 해결해야 했던 문제도 있었다. 전국에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다니고 또 수많은 사람을 만난 만큼 모든 사람이 그의 연구에 협조적인 것도 아니었다.
“’한국주택의 변천과 발전’에 대한 석사논문을 위한 답사를 할 때는 여러 전통가옥을 방문해야 했지요. 그럼 집 주인이 ‘어제는 도둑이 들어서 아무나 들일 수 없습니다’ 라며 거절합니다. 소개를 받아서 가면 소개장을 가져오라고도 했죠. 어떤 집에서는 창문을 열었더니 안주인이 말하길 ‘우리 집에는 일제 강점기 때에도 순사가 함부로 오지 못하는 집이었는데 어떻게 남의 집의 창을 함부로 여느냐’며 불호령을 내린 적도 있었죠.”
이뿐 아니다. 다른 집을 방문 할 때 다락 같은 은밀한 곳을 열어 볼 수 없다는 것도 연구의 한계였다. 지방에 내려가 향교나 사당을 들어 갈 때도 섬뜩한 느낌에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60년대의 덕수궁 함녕전에 들어갈 때에도 고종황제가 독살당한 장소라는 것이 떠올라 갑자기 등골이 서늘했습니다. 지금은 물론 보존이 잘 되어있지만 옛 향교나 문묘를 들어가 보면 그 당시엔 거미줄은 물론, 박쥐가 날아 다니기도 했답니다.” 

 

한국 창문화의 변천사

 
한국 창문화의 변천사를 알아보는 것도 주교수가 추진했던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보면 창호에 대한 많은 문헌들이 나온다. 실증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고구려 쌍영총 벽화고분에 창이 그려져 있는 것도 확인 할 수 있다. 가야토기에 그려진 앙증맞은 창의 모습도 있다. 고구려 성곽인 안학궁 터에도 문지가 발견되므로 조상들의 문과 창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다. 백제시대 빗살창호가 일본 나라의 법륭사 오륜탑과 똑같은 모양인 것은 특이한 점이다.
신라시대 분황사 탑의 부도 이면에는 문짝과 문고리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이 문과 창의 모습을 실증해 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되는 것이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가보면 네 짝의 정자살 창호가 있습니다. 이 창호의 특징은 들어열개 형식으로 되어 있어요. 들어열개란 문짝의 돌쩌귀 반대편을 들쇠에다 매다는 형식인데 이는 우리나라에 창호의 가장 큰 특징을 보여줍니다. 우리만의 아주 독특한 개폐법이죠.”
또한 우리나라 공간에 있어서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채와 간의 문화라는 것이다. 안채와 사랑채를 짓고 그 안에 안방과 대청 건넛방을 짓는다.
이에 공간의 분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창호인데 우리나라의 창호는 중국과 일본과 다르게 창호의 창살이 안이 아닌 바깥으로 나온 형태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 건축에 있어서 창이란 바깥에서 볼 때는 선적인 구성이라 일컬어진다.
“우리나라 창호의 들어열개라는 독특한 개폐법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들어서 들쇠에 메다는 순간부터 자연공간과 내부공간이 합일, 융화된다는 점 때문입니다.”

 

전통의 현대화
우리나라 전통 창호의 맛을 어떻게 현대에 맞게 버무려 사용하느냐의 문제는 쉽지 않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전통적인 모양새를 잘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디자인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조상들이 과거 창호지를 사용하여 빛을 반 투과 시켜 은은한 맛을 연출 했듯 현대에서 바깥에는 투명한 유리를 쓰고 안에는 한 번 더 창호지와 같은 질감이 나는 물체를 사용해 전부 닫으면 은은한 실내공간이, 필요할 때 열면 투명한 유리로 바깥과 소통할 수 있는 그런 제품이 나오면 어떨까 싶습니다”
광화문 광장 조성과 세종대왕 동상 제작을 총괄하면서 느꼈던 감동을 알고, 경복궁 복원 정비작업과 예전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자문위원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 주 교수가 한국건축, 그리고 창호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담을 수 있을까.
“요즘은 잊혀져 있던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주어진 시간을 뜻 깊게 보내고 그 삶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 감동을 받는 것만큼 값진 게 있을까요? 건축도 마찬가지 입니다. 삶 속에 감동을 주고 받아야 합니다. 건축가들도 창호를 제작하는 사람들도 후대에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려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끊임없는 연구개발과 공부 외에는 다른 지름길이 없다고 역설한다. 주교수가 체험했듯 현장에서 보고 느낀 그 감동으로 항상 공부해야 하며 무엇보다 전통적인 것들과 긴밀히 소통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전통과 소통하려는 후대인의 모습 속에서 조상의 지혜가 감동으로 버무려지는 날이 기대되는 말이다. 최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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